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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스포츠 기자단

 

 

2019년, 전국체육대회가 100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번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는 서울이 24년만에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100년을 잇는 중요한 의미를 또 하나 남겼습니다.

 

 

전국체전은 1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온 만큼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체육대회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의 근·현대 스포츠 역사 100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국체육대회는 1920년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국체육대회의 시작으로 보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全朝鮮野球大會)>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정책 변화를 시도하는 과정 속에서 민족적 저항을 달래보고자 진행되었습니다. 전조선야구대회는 배제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었는데 전국의 중학부와 청년부 각 5개 팀이 출전하였습니다. 당시 유료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선인이 관람하였다고 합니다.

 

 

 

 

<전조선야구대회> 우승기,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이후 최초의 종합운동장(현재 DDP)인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이 1925년 10월 개장되었습니다. 경성운동장은 일본의 히로히토 왕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훈련원공원 부지 동쪽에 건립되었는데, 총 면적은 약 22,000평, 수용 인원은 약 25,800명으로 이간수문(二間水門)과 한양도성의 성벽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경기장, 야구장, 정구장, 수영장까지 갖추어 만들어진 운동장은 동양 제일의 운동장으로, 체육을 통해 일제의 군국주의를 조선인에게 주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대규모 스포츠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스포츠를 통해 일제의 억압에 저항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의지는 점차 커져만 갔습니다.

 

 

경성운동장 수영장 사진엽서, 사진 출처 : 청계천박물관 남소문동천 전시도록

 

 

1934년에는 축구, 농구, 야구, 육상, 정구 등 5종목의 경기로 이루어진 <조선종합경기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이후 해가 거듭될수록 <조선종합경기대회는> 다양한 종목이 추가되면서 더욱더 성장, 발전해나갔습니다. 1935년에는 씨름, 검도, 유도, 역도가 추가되었으며 1936년에는 권투, 탁구, 빙상이 추가되었고 1937년에는 배구가 추가되었습니다. 경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참여하는 조선인의 숫자도 늘어났으며 조선인들의 체육 수준 또한 높아졌습니다. 조선인들은 단순히 흥미로 스포츠를 즐긴 것이 아니라 민족 저항 의식의 방법으로 ‘체육’을 이용하였습니다.

조선 총독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시작으로 조선인들이 스포츠를 이용한 민족 저항 의식이 커지자 1938년 조선체육회를 강제로 해산하였습니다. 이후 전국체육대회는 잠정적으로 중단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독립하면서 그해 12월 전국체육대회는 다시금 부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 1945년부터는 남한만이 참여하게 되었고, 1948년에는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으며 공인대회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후, 대한민국 스포츠는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됩니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대한민국 KOREA’의 이름을 걸고,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우리 선수들이 세계무대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대회에서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첫 올림픽 메달 수여자가 되었습니다.

 

 


1948년 김성집 동메달 수여식, 사진 출처 :대한체육회

 

1960-70년대 대한민국 스포츠는 정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1952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가 시작되었으며, 1967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구로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밖에 국제시장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수단으로써 많은 스포츠 종목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후원을 받게 되고, 국제무대에서 스포츠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1976년 캐나다에서 열린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첫 10위권의 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서울올림픽대회 유치를 확정하게 되면서, 제62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88서울올림픽 유치를 기념하는 카드섹션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1982년에는 각 지역을 연고로 하는 6개팀(MBC청룡, 삼성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해터 타이거지, OB 베어스, 삼미 슈퍼스타즈)의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였으며, 1983년 한국 프로축구가 ‘수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프로스포츠는 3S정책(Screen 영화, Sport스포츠, Sex섹스에 의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성장하였다는 어두운 면도 있지만, 전국민이 스포츠에 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역할 또한 하였습니다.

 

 

제62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 사진 출처 : 대한체육회 홈페이지

 

 

한민국 스포츠는 1990년대 말 대한민국 경제 위기 속에서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 살아있는 전설인 박찬호 야구선수와 박세리 골프 선수는 IMF 경제 위기로 힘들어하던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선사하였으며 우리 국민을 다시금 하나로 뭉치게 하였습니다. 박찬호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1997년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 1998년 15승 9패 평균자책점 3.71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골프의 여제 박세리 선수는 1998년 맥도날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였고, 그해 US여자오픈 챔피언십에서도 챔피언에 오르게 됩니다.

 

 

박세리, 1998년 US오픈 맨발의 투혼(출처_KBS)

 

 

2000년대 들어와서는 2002년 한·일 FIFA월드컵에서 4강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새로운 신화를 만들었습니다. 하계 올림픽에서 항상 종합순위 10위권 내의 놀라운 기록을 세우던 대한민국은 2000년대 동계 올림픽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러한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 속에서 이번 전국체육대회 100년은 대한민국 체육 역사에 새로운 기록을 추가하는 만드는 의미 있는 행사라 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올해는 1919년 3·1 운동의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뜻깊은 한 해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우리의 역사를 자양분 삼아 성장해왔듯, 전국체육대회 아픈 역사적 상황 속에서 첫발을 딛게 되었지만, 현재는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균형 있는 성장이라는 발전된 가치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의 성공적인 마무리는 의미가 크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을 수 있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이승규, 「近代 身體文化 形成과 日帝强占期 學校體育」,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이혜지, 「한국프로야구의 성립과정」,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중앙일보, 「제70회 야구에 살다(14)「전조선 야구대회」」, 1980.09.11. 기사.

서울 2019 제 100회 전국체육대회 홈페이지 참조.